어제, 오랫만에 나를 열받게 만드는 한 분의 고객이 오셨었다.
나이 만 22세, 주소가 조금 먼 걸 보면 분명 이 부근의 대학을 다니고 있는 학생으로 짐작되는 심하게 마른 체격의 키가 크고, 잘 생긴편이나 어딘가 예민해보이는 인상의 남자분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나 "오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고객 "귀가 막힌 것 같아요"
나는 자판에 위치를 맞추어 준비하고 있던 손가락을 슬며시 오무리고, 고개를 돌려 내 오른쪽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경성대학교 바로 앞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의원'이기에, 가끔은 한의원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야 할 분들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실제로 '귀가 막힌' 증세라면 빨리 ENT로 보내는 것이 고객과 나, 둘다에게 더 나은 방법이었기에 조금 더 들어보리라 생각했다.
일단 심한 축농증이나 비염이 있으면 귀가 막힐 수 있을 거고, 고막이나 청력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귀의 압력 조절이 잘 못하면 먹먹한 느낌이 생길 수도 있고, 귀에 약한 이명이 있어도 막힌듯한 느낌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하고 r/o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질문을 드렸다.
나 "귀가 어떻게 막힌 느낌이세요? 코가 같이 막히는 느낌은 없구요? 귀에서 소리가 나진 않나요? 어느쪽 귀인가요?"
고객 (멈칫멈칫하다가) "숨이 좀 차는 것 같아요"
나는 아직까진 책상위에 놓여있던 팔을 완전히 무릎에 얹은 뒤, 의자를 전체적으로 돌려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요즘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라 쓰고 대학생이라 읽는다)들이 더러 있었기에 대화의 촛점을 흐트리지 않기 위해서 핵심을 잡아야겠다 생각했다.
나 "둘 중에 어느 게 더 불편하세요? 일단 더 불편한 걸 먼저 봐드릴께요"
고객 (우물쭈물하며) "숨이 가쁘고 숨 소리가 크게 들려요"
나 "어떨 때 그런 증세들이 있으세요? 가만히 앉아있거나, 평지를 걸을 때도 그런가요?"
고객 (오른 쪽 귀에 슬며시 손을 올리며) "귀를 막고 숨을 쉬면 숨 쉬는 소리가 크게 들려요"
이 때 부터 슬며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고객님의 불편사항이고, 의료서비스라는 허울좋은 직업을 갖고 있는 나이기에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도리어 더 심하게 방긋 웃어드렸다. 미운놈일 수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거다 생각하면서.
나 "아~ 그럼 숨이 차는고 숨소리가 크게 들리는 증세가 더 불편하신거군요?"
고객 "그건 아니고, 계속 귀가 막힌 느낌이 들어요"
나 "귀는 어떤 식으로 막힌 느낌인가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거나, 약하게 들리거나, 귀에 물 들어간 것 처럼 먹먹하거나, 뭐 어떤 느낌인가요? 조금 자세하게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고객 (망설이다가) "그냥 귀가 좀 막힌 것 같아요. 귀를 막고 숨을 쉬면 숨소리가 좀 거친 것 같아요"
짜증의 단계가 2단계로 올라갔다.
질문의 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도 조금은 짜증이 났지만 그것보다는 귀가 막힌것과 숨 소리가 거친 것 - 전혀 연관성 없는 증세 - 을 같이 엮어서 말하는 부분이 심하게 어색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고객님의 말씀을 경청해야겠다 생각하고 귀를 막고 숨을 쉬어보았다.
나 "원래 귀를 막고 숨을 쉬면 호흡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립니다. 평지를 걷거나 가만히 앉아있을 때도 그런가요?"
고객 "그건 아니고 좀 빨리걷거나 비탈진 길을 걸으면 그런 것 같아요"
짜증의 레벨 3으로 업그레이드. 준 최종 보스몹을 상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빨리 걷거나 비탈진 길을 걷거나 하면 힘드니까, 근육에서 산소를 더 필요로 하니까, 평소보다 호흡수도 많아지고, 호흡수가 많아지다 보면 호흡이 거칠게 느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난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난 프로니깐.
나 "평소에 운동 별로 안 하시죠?"
고객 "아니요. 주말에는 가끔 운동 합니다"
레벨이 4로 올라가면서 이마에 저절로 ++ 표가 생기는 애니메이션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디선가 '빠직'하는 효과음이 들려왔다
'평소에 운동 별로 안한다'와 '주말에는 가끔 운동한다'가 어째서 다른 말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넉다운시켜버리고 싶은 욕심이 어느 한구석에서 조금씩 피어올랐지만 아직 애니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뻣뻣해지면서 후들리는 볼에 힘을 주었다.
나 "그럼 귀를 막고 좀 빨리 걷거나 비탈진 길을 걸으면 숨소리가 거칠고 귀가 막힌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고객 (왠지 기쁜 듯한 눈빛이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짜증이 드디어 최고 레벨을 찍었다.
야이놈시키야!!
평소에운동안하다가빨리걷거나비탈진길을걸으면당연히숨이차니까숨이막히고호흡이힘들어지는거고코와폐를연결하는기도가머리안에있으니까귀를막으면머리안에서숨쉬는소리가당연히더크게들리니까숨소리가더거칠게느껴지지그리고도대체왜귀막고걷고지롤이야!!!!라고 한마디로 쏘아붙이고 싶은 것과 저절로 어금니가 악물리는 것을 간신히 참고 한 마디로 정리를 마쳤다.
나 "말씀하신 증세는 다 정상적인 걸로 보여지는데요, 그래도 조금 더 자세한 검사를 원하신다면 양방 병원쪽으로 가보세요. 귀가 막히는 증세는 이비인후과로 가셔서 문의해보시구요, 숨이 가쁜 증세는 호흡기내과로 가시면 폐활량이나 호흡에 대한 검사를 받아보실 수 있으니까 그 쪽으로 가셔서 검사를 받아보시면 되겠습니다"
바로 일어서서 어서 고객님(이라고 쓰고 놈이라고 읽는다)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그분이 나가자 마자 크게 심호흡 3회, 그리고 인터폰을 들어 데스크에 앉아있던 간호사에게 바로 말했다.
나 "그냥 가시면 되고요, 차트는 삭제해버리세요."
이 업을 시작한 지 8년째. 곧 9년째에 접어들 거고, 4년간의 병원생활에 거친 동네에서의 부원장생활, 관리에다 한의원생활 거치면서 별별이상한 고객들도 많이 만났고, 어지한간 일에는 웃으면서 해결할 수 있다 자부해왔건만.
질문 하면 요지를 파악 못하고 딴소리 하는 고객님(이라고 쓰고 놈이라고 읽는다)들과, 질문했을때 '저요?' 하고 되묻는 고객님(이라고 쓰고 뇬이라고 읽는다) - 도대체 이 방에 나 말고 누가 있다고, 내가 니 뒤에 서있는 귀신한테 물어보니, 그럼? - 들은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수련이 모자란가보다.
10년을 채우면 조금 더 프로다운 모습이 될까? 이 분들을 조금 더 불쌍하고 어엿비 여겨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주게 될까?
나로써도 참 궁금한 부분이다.
나이 만 22세, 주소가 조금 먼 걸 보면 분명 이 부근의 대학을 다니고 있는 학생으로 짐작되는 심하게 마른 체격의 키가 크고, 잘 생긴편이나 어딘가 예민해보이는 인상의 남자분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나 "오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고객 "귀가 막힌 것 같아요"
나는 자판에 위치를 맞추어 준비하고 있던 손가락을 슬며시 오무리고, 고개를 돌려 내 오른쪽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경성대학교 바로 앞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의원'이기에, 가끔은 한의원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야 할 분들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실제로 '귀가 막힌' 증세라면 빨리 ENT로 보내는 것이 고객과 나, 둘다에게 더 나은 방법이었기에 조금 더 들어보리라 생각했다.
일단 심한 축농증이나 비염이 있으면 귀가 막힐 수 있을 거고, 고막이나 청력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귀의 압력 조절이 잘 못하면 먹먹한 느낌이 생길 수도 있고, 귀에 약한 이명이 있어도 막힌듯한 느낌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하고 r/o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질문을 드렸다.
나 "귀가 어떻게 막힌 느낌이세요? 코가 같이 막히는 느낌은 없구요? 귀에서 소리가 나진 않나요? 어느쪽 귀인가요?"
고객 (멈칫멈칫하다가) "숨이 좀 차는 것 같아요"
나는 아직까진 책상위에 놓여있던 팔을 완전히 무릎에 얹은 뒤, 의자를 전체적으로 돌려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요즘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라 쓰고 대학생이라 읽는다)들이 더러 있었기에 대화의 촛점을 흐트리지 않기 위해서 핵심을 잡아야겠다 생각했다.
나 "둘 중에 어느 게 더 불편하세요? 일단 더 불편한 걸 먼저 봐드릴께요"
고객 (우물쭈물하며) "숨이 가쁘고 숨 소리가 크게 들려요"
나 "어떨 때 그런 증세들이 있으세요? 가만히 앉아있거나, 평지를 걸을 때도 그런가요?"
고객 (오른 쪽 귀에 슬며시 손을 올리며) "귀를 막고 숨을 쉬면 숨 쉬는 소리가 크게 들려요"
이 때 부터 슬며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고객님의 불편사항이고, 의료서비스라는 허울좋은 직업을 갖고 있는 나이기에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도리어 더 심하게 방긋 웃어드렸다. 미운놈일 수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거다 생각하면서.
나 "아~ 그럼 숨이 차는고 숨소리가 크게 들리는 증세가 더 불편하신거군요?"
고객 "그건 아니고, 계속 귀가 막힌 느낌이 들어요"
나 "귀는 어떤 식으로 막힌 느낌인가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거나, 약하게 들리거나, 귀에 물 들어간 것 처럼 먹먹하거나, 뭐 어떤 느낌인가요? 조금 자세하게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고객 (망설이다가) "그냥 귀가 좀 막힌 것 같아요. 귀를 막고 숨을 쉬면 숨소리가 좀 거친 것 같아요"
짜증의 단계가 2단계로 올라갔다.
질문의 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도 조금은 짜증이 났지만 그것보다는 귀가 막힌것과 숨 소리가 거친 것 - 전혀 연관성 없는 증세 - 을 같이 엮어서 말하는 부분이 심하게 어색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고객님의 말씀을 경청해야겠다 생각하고 귀를 막고 숨을 쉬어보았다.
나 "원래 귀를 막고 숨을 쉬면 호흡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립니다. 평지를 걷거나 가만히 앉아있을 때도 그런가요?"
고객 "그건 아니고 좀 빨리걷거나 비탈진 길을 걸으면 그런 것 같아요"
짜증의 레벨 3으로 업그레이드. 준 최종 보스몹을 상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빨리 걷거나 비탈진 길을 걷거나 하면 힘드니까, 근육에서 산소를 더 필요로 하니까, 평소보다 호흡수도 많아지고, 호흡수가 많아지다 보면 호흡이 거칠게 느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난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난 프로니깐.
나 "평소에 운동 별로 안 하시죠?"
고객 "아니요. 주말에는 가끔 운동 합니다"
레벨이 4로 올라가면서 이마에 저절로 ++ 표가 생기는 애니메이션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디선가 '빠직'하는 효과음이 들려왔다
'평소에 운동 별로 안한다'와 '주말에는 가끔 운동한다'가 어째서 다른 말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넉다운시켜버리고 싶은 욕심이 어느 한구석에서 조금씩 피어올랐지만 아직 애니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뻣뻣해지면서 후들리는 볼에 힘을 주었다.
나 "그럼 귀를 막고 좀 빨리 걷거나 비탈진 길을 걸으면 숨소리가 거칠고 귀가 막힌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고객 (왠지 기쁜 듯한 눈빛이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짜증이 드디어 최고 레벨을 찍었다.
야이놈시키야!!
평소에운동안하다가빨리걷거나비탈진길을걸으면당연히숨이차니까숨이막히고호흡이힘들어지는거고코와폐를연결하는기도가머리안에있으니까귀를막으면머리안에서숨쉬는소리가당연히더크게들리니까숨소리가더거칠게느껴지지그리고도대체왜귀막고걷고지롤이야!!!!라고 한마디로 쏘아붙이고 싶은 것과 저절로 어금니가 악물리는 것을 간신히 참고 한 마디로 정리를 마쳤다.
나 "말씀하신 증세는 다 정상적인 걸로 보여지는데요, 그래도 조금 더 자세한 검사를 원하신다면 양방 병원쪽으로 가보세요. 귀가 막히는 증세는 이비인후과로 가셔서 문의해보시구요, 숨이 가쁜 증세는 호흡기내과로 가시면 폐활량이나 호흡에 대한 검사를 받아보실 수 있으니까 그 쪽으로 가셔서 검사를 받아보시면 되겠습니다"
바로 일어서서 어서 고객님(이라고 쓰고 놈이라고 읽는다)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그분이 나가자 마자 크게 심호흡 3회, 그리고 인터폰을 들어 데스크에 앉아있던 간호사에게 바로 말했다.
나 "그냥 가시면 되고요, 차트는 삭제해버리세요."
이 업을 시작한 지 8년째. 곧 9년째에 접어들 거고, 4년간의 병원생활에 거친 동네에서의 부원장생활, 관리에다 한의원생활 거치면서 별별이상한 고객들도 많이 만났고, 어지한간 일에는 웃으면서 해결할 수 있다 자부해왔건만.
질문 하면 요지를 파악 못하고 딴소리 하는 고객님(이라고 쓰고 놈이라고 읽는다)들과, 질문했을때 '저요?' 하고 되묻는 고객님(이라고 쓰고 뇬이라고 읽는다) - 도대체 이 방에 나 말고 누가 있다고, 내가 니 뒤에 서있는 귀신한테 물어보니, 그럼? - 들은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수련이 모자란가보다.
10년을 채우면 조금 더 프로다운 모습이 될까? 이 분들을 조금 더 불쌍하고 어엿비 여겨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주게 될까?
나로써도 참 궁금한 부분이다.
Trackback URL : http://fazing.net/trackback/239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
erotica 2008/12/03 14:23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병원에는 왜 온건지 모르겠는 양반이군 ㅎㅎㅎㅎ 공강시간에 할 일이 없었나벼 ㅎㅎㅎ(설마 내 후배는 아니라고 믿고싶은고다)
구름비 2008/12/03 14:23 편집/삭제 댓글 주소
깜짝이야 -0-
글 다 쓴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빠르삼.
그러게말이~ 건강염려증같은 느낌이었다능..
벨벳 2008/12/03 21:33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국어 이해는 정말 소중하지.
구름비 2008/12/04 10:41 편집/삭제 댓글 주소
정말이지 온.몸.으.로. 절실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