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 공부 마치고 우연히 엄마랑 컨택해서 보게 된 영화.
물론 엄마가 고르신터라 사전정보 전혀 없었고, 마타하리 같은 여자 스파이물이라고 생각하신듯 했다.
극심한 황사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동래 CGV로 향했다.
어찌나 황사가 심했던지 평소에는 인공적인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던 극장 안 공기가 무척이나 쾌적하게 느껴지더라. 하나의 상영관, 거기다 제일 작은 관에서 상영하고 있어 처음에는 사실 쬐끔 불안했었다.
사람의 선입견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을 새로이 보게 되었다.
'원초적 본능' '스타십 트루퍼스'의 폴 버호벤 감독.
사실 중간에 몇 편 더 있는 것 같긴 한데 '스타십 트루퍼스' 이후로는 흥행에 실패했는지 늘상 저 두개만 수식어로 따라다니더군. 물론 저 두 편을 다 보았지만, 좀처럼 호감이 생기지 않았던 이유를 한 마디로 줄여보자면 '너무 노골적이어서'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전쟁터이니 총알들이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다칠테지만, 언제부터인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노골적인 인체 훼손장면(예를 들어 두개골이 쪼개져서 뇌수가 흐른다거나, 절단된 팔이 날아나니는 장면)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 영화 '람보' 와 '못말리는 람보'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죽어 나가는 사람 단위는 엄청난데 비해 피 흐르는 장면들은 대개 생략 되었고 못말리는 람보에서는 그런 부분을 아주 재미있게 비꼬았다 - 그런 영화에 익숙해 있다가 폴 버호벤 감독의 노골적인 묘사에 일견 당황스럽고 -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 헐리우드 영화와는 다른 낯선 느낌에, 재밌게 본 영화의 감독이지만 감독 자체는 비호감쪽에 가까웠었다.
그러구 나서 본 게 이 영화 '블랙북' 이다.
영화의 시작은 아주 고전적인 공식을 답습한다. 아주 오래전 친구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한 회상으로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여 주인공의 삶을 담아낸다. 화려한 미사여구없이 아주 담담하게 그리고 핵심부분만 조목조목 짚어내면서 영화는 여러 사람들을 보여준다.
낯설디 낯선 히브리어 노래에다 어딘가 귀에 익지만 어색한 네덜란드어 - 내 귀에는 독일어와 비슷하게 들렸었다 - 가 주를 이루면서 독일어와 영어까지.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아마 나치든 네덜란드인이든 모든 이들이 영어로 말을 하는 진귀한 장면을 연출했을 거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고 나서 언뜻 떠오른게, 아아. 이 감독 네덜란드 사람이었구나.
2차 대전때 나치에게 점령을 당한 모습이라던지, 지하에서 투쟁하는 군인들이나 전쟁으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까지, 내 조국이니만큼 잘 알면서도 드러내기 힘든 부끄러운 부분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는 시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 마약이나 매춘에 대한 - 자유스러운 분위기들이 그를 키웠다고 생각하니 영화에서 보여준 장면들이 조금은 누그럽게 느껴졌다. 섬세한 스토리 텔링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 것 같지만 - 전작들에서도 그러하다 - 특별히 튀는 부분 없이 뚝심있게 밀고 가는 그의 재능은 여타 오락영화들 보다는 '블랙북' 같은 영화류가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잡설이 길긴 했는데, 긴 영화치곤 호흡을 따라가기 힘들지 않아 무난하게 잘 볼 수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섬세하진 않지만, 그리고 어찌 보면 뻔한 스토리겠지만 재미있게 봤던 건 감독과 배우의 힘인 것 같다. 볼수록 묘한 매력을 지닌 여자 주인공의 매력적인 목소리도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구성요소라고 생각된다.
전쟁영화이지만 로맨스에 더 가까운,
낯선 설정이지만 낯익은,
그런 영화를 원한다면 강추.
개인적으로는 별 네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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